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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림제일교회 서종로 장로 원로장로 추대 2017-09-06
작성자 홍보실 조회수: 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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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부터 소아마비, 결핵성 골수염으로 매일 고름 치료를 하다가 기도를 통해 고름이 완치되는 역사를 체험한 후 그동안 교회와 교단사역에 크게 기여했던 서종로 장로(신림제일교회)가 9월 3일(주일) 오후 3시 신림제일교회(박충신 목사)에서 있었던 “원로장로 및 명예권사 추대식”에서 원로장로로 추대됐다. 특히, 이 자리에는 총회장 김원교 목사가 참석하여 “은혜 때문에”(딛 2:11~14)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그리고 총회, 예성 증경부총회장단회, 예성 원로장로회전국연합회, 예성 장로회전국연합회에서 공로패 및 선물을 증정했으며, 그밖에 증경 총회장, 지방회장, 기관 및 단체장들의 권면과 축사가 있었다.

서 장로는 “예수 믿기 전에 소망 없이 술, 노름 등 방탕한 삶 속에서 살아왔었다”면서 “예수를 믿으면서 장홍수 목사님으로부터 배운 바른 신앙생활, 기도하는 자세, 정성된 십일조 생활 등을 철저히 실천했더니 선교사들을 위한 쉼터 개원, 교회 및 군부대 간증 등으로 하나님이 들어 쓰셔서 전국적으로, 세계적으로 사용하심에 늘 감사한다”고 밝혔다. 서 장로는 전남 여천 출생으로 지체장애인 2급이다. 그동안 예성 부총회장, 예성 장로회전국연합회 회장, 희망선교회, 한국달리다굼장애인선교회, 들소리신문 이사장, 한국성결교연합회 평신도위원장, 성결대학교 이사 등을 역임했으며, 현 동방주택 대표를 맡고 있다. 다음은 과거 들소리신문에 실렸던 서 장로의 간증 기사내용이다.

서종로 장로는 3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런데 세 살 때 소아마비를 앓아 어머니의 등에 업혀 2년간 침 맞으며 고쳐보려 애썼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어린 서종로는 다리가 불편한 것 외에는 건강하고 장난꾸러기였다. 그렇게 서울로 올라와서 중학교를 다니며 남들이 하는 것은 다 쫓아하면서 놀았다. 그러다가 서서 썰매를 타다가 넘어져 다리를 다친 후 고름이 나와 병원에 가보니 골수염이라며 다리를 절단해야 한다고 했을 때 서종로는 예약을 하고도 병원에 가지 않았다. 그러나 다리가 굉장히 아파 움직일 수조차 없게 됐고 학교도 못가고 1년간 누워서 지내자 다리는 더욱 뻣뻣하게 굳어졌다. 어쩔 수 없이 시골 어머니가 계신 곳으로 내려가 혼자 아침 저녁으로 고름을 빼내고, 수술도 다섯 번 씩이나 했지만 낫지도 않고 재발만 됐다. 더 이상 고치겠다는 것을 포기하고 살았는데, 그즈음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형제들은 어려워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만 했다.

서종로는 어떤 계기로 치료를 위해 전남 여수에 있는 애양원에 갔다. 나환자들이 대부분인 그곳에서 청년 서종로는 아름다운 광경을 발견한다. 70세, 65세로 보이는 나환자 할머니 둘이 걷고 있는데 앞에 가는 할머니는 머리에 물건을 이고 한 손엔 다른 것을 들고 가고 있었고, 그 뒤에 좇아가는 할머니는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하고 자꾸 뒤쳐지고 있었는데 그러면서도 "무거울텐데 들고 가는 것이라도 내게 줘, 내가 들고 갈께"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서종로에게는 왜 그렇게 그 광경이 눈에 꽉 차오던지… 아무말도 못하고 한참 동안을 바라보면서 "나도 저렇게 도와가면서, 남의 짐을 들어주면서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나환자들은 그곳에 격리돼서 살아야 하지만 그들에 비하면 자신의 삶은 자유롭고 더 나은 모습임을 발견했다. 대가도 없이 그곳에서 봉사하는 기독교인들을 보면서 잠시나마 감동도 받고, 예배도 드려보았다. 그러나 병은 낫지 않아 6개월만에 퇴원했다. 그리고 이발소를 운영하던 형에게서 예전에 조금 배운 것을 토대로 이리 저리 이발소를 전전하며 기술을 익히게 됐다. 그러다가 현재의 아내를 만나 가정을 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내는 겉의 "장애"는 알았지만 3개월간 다리에서 흐르는 고름을 짜내는 것을 몰랐다가 알고는 실망하기도 했다. 몸도 성치 않고, 돈도 없고, 빚까지 있던 터였다. 아내는 끝내 함께 살지 못하겠다고 말하고 집을 나갔으나 도저히 불쌍해서 그냥 둘 수 없다며 다시 돌아왔다. 그렇게 둘은 합심해서 이발관을 경영하다가 "76년 서울로 올라와 벽돌공장을 운영하는 형에게서 배우며 일했다. 그때 아내는 처녀시절에 다녔던 교회를 찾아 믿음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서 씨는 당시 주색잡기에 푹 빠져 지냈다. 그런데 아내는 교회를 다니면서는 그전처럼 잔소리도 하지 않고 모든 것을 다 용서하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1년에 몇 번이라도 남편을 교회에 데리고 가려고 애를 쓰고, 어떤 속상함도 참을 정도로 바뀌었다. 그렇게 몇 년간 서울서 살던 어느날 다리가 또 굉장히 아프기 시작했다. 일주일이 멀다하고 병원에 갈 정도였고, 고름을 손수 짜내야 하는 아픔을 참기 위해 서 씨는 담배도 씹어서 태울 정도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어서 다시 수술을 해야할 상황이 됐다.

병원 수술대 위에 누워 있는데 아내가 다니는 교회 목사님이 오셔서 "의사의 손길을 통해 꼭 낫게 해달라"며 기도해 주시는데 내용이 서 씨의 마음에 와 닿았다. 집에 심방온다는 소리를 들으면 늘 도망다니곤 했었는데 기도를 받으니 평안해졌다. 수술한 지 10일 만에 퇴원했는데 목사님이 기도해 주신 대로 그 이후 지금 현재까지 고름이 나지 않았다. 수십 년간 병원 다니며 약 먹고, 몇 번 씩 수술해도 재발하고, 고름을 아침 저녁으로 짜내야 하는 그 고통이 멈춘 것이었다. 그 이후 서 씨는 교회에 비교적 잘 나가기 시작했다. 자신이 잘못했더라도 아무 말 하지 않고 용서해주는 아내를 보면서 그의 마음도 녹아지기 시작했다. 교회 다니기 전에 고약하던 성질도 사그러들었다. "하나님 믿으면 저렇게 달라지는구나"라는 생각이 마음에 그득 차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색잡기도 차차 서 씨에게서는 멀어져가고 교회 일에 시간도, 물질도, 마음도 더 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교회 건축을 하는데 건축위원으로 활동하고, 자신이 운영하고 있는 벽돌공장에서 벽돌도 납품했다. 교회는 무사히 건축이 완공됐는데 그 즈음 공장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서 씨는 60만 여 장에 달하는 벽돌값을 달라고 목사님께 몇 번을 얘기했으나 교회도 어려웠던 터라 "기도합시다"라는 답변만 돌아왔다. 그렇게 되자 목사님 만나는 것도 거북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 기도하는 중에 "네 아버지 집 지으며 아버지에게 벽돌 값 내라고 이 야단이냐"하는 음성을 들었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아버지"라는 말이 생소했는데 "아버지"라고 친히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서 씨는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벽돌값 모두를 건축헌금으로 드렸다. 무엇보다 좋아하는 것은 그의 아내였다. 그렇게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뤄졌기 때문일까. 그 뒤부터는 많은 부분이 감사로 다가왔다. 교회에서 장로 직분도 받았고, 하나님 만나서 병도 낫고, 믿음도 확실해졌고, 축복도 받았다.

주변 9개 공장에서 제일 악조건이었는데 웬일인지 자신의 공장 물건만 빗발치게 주문이 쇄도하는 경험도 했다. 교회 일이라면 열심이고 자신의 일처럼 하는 아내의 모습이 이제 자신의 일이 돼버렸다. 하나님께 받은 경험이 있는 서 장로는 이제 무슨 일에 앞서서 먼저 감사 헌금을 할 정도까지 변화됐다. 십일조 생활 철저히 하는 것을 자녀들에게 모범을 보이면서 그에 대한 축복도 확인하게 하고 있다. 지체장애 2급이지만 그에겐 여기저기서 후원 요청이나 함께 연합해서 일하자는 제안이 적지 않다.

그럴 때 많은 이들은 시간이나 물질의 구애를 받지 않으려 이리 저리 피하지만 그는 "나 같은 사람을 어떻게 알아서 서신이나 우편으로까지 연락이 올까" 하면서 소홀히 하지 않고 힘 닿는 한 최선을 다해 협력하기를 기뻐한다. “만남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제 아내를 만나서, 좋은 목사님과 사모님을 만나서, 그리고 함께 격려하며 살아갈 수 있는 교회 내 성도들을 만나서 제게는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이야기 내내 웃음을 잃지 않는 그의 모습에서, 그리고 하나님과의 나름대로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그의 모습에서 여유와 행복을 엿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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