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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 8) 예수께서 우리를 속량하셨다 2017-09-20
작성자 강금성 조회수: 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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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8) 이신칭의는 거짓된 교리라는 둘째 증거 : 예수께서 우리를 속량하셨다


  종교개혁자들은 “예수께서 우리를 속량해 주셨습니다.”(롬 3:24, 딛 2:14) 혹은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오셨습니다.”(막 10:45, 딤전 2:6, 벧전 1:18)라는 말씀을 근거로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덧입는 의나 전가되는 의로 해석했고, 이를 근거로 이신칭의의 교리를 주창했습니다. 그러나 ‘속량하다’와 ‘대속하다’란 단어가 성경에서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를 살펴보면, 그것들이 이신칭의 교리의 성경적 근거가 될 수 없고, 오히려 이신칭의는 거짓 교리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롬 3: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위 구절들은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에 대해 세 가지를 말합니다. 첫째,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됩니다. 이것은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고자 하는 것과 대조됩니다. 그러므로 루터가 외친 ‘오직 믿음’(sola fide)은 진리입니다. 둘째,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하나님의 의로 말미암아 은혜로 값없이 얻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율법의 행위로 얻는 ‘자기 의’와 대조됩니다. 그러므로 ‘오직 은혜’(sola gratia) 역시 진리입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이 속량을 이신칭의의 한 근거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것을 알면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밝히 드러나며, 이신칭의가 거짓 교리라는 것도 드러납니다. 

1. 속량의 뜻

  롬 3:24절에서 사용된 ‘속량’은 헬라어 ‘뤼트로오’(게시판이 헬라어를 인식하지 못하므로 한글로 표시합니다)에서 파생된 ‘아폴뤼트로시스’란 단어로 ‘해방’ ‘석방’ ‘구속’을 의미합니다. 속량이 해방을 의미한다면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도 당연히 죄의 종노릇에서 벗어남으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는 실제적인 의를 가리키는 것이지, 덧입는 의로 얻는 칭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뤼트로오’와 뤼트로오에서 파생된 단어들(뤼트로오의 어군에 속한 동족어들)이 성경에서 어떻게 쓰였는지 보겠습니다. 

①뤼트로오. ‘뤼트로오’는 신약성경에서 3회 사용되었습니다. 그중 2회는 ‘속량하다’로 변역했는데,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눅 24:21)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딛 2:14)입니다. 다른 한 곳에서는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벧전 1:18)이라고 하여 뤼트로오를 ‘대속하다’로 번역했습니다. 이처럼 ‘뤼트로오’는 이방인의 압제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다’, 혹은 불법이나 헛된 행실로부터 ‘벗어나다’의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뤼트로오’는 어떤 상태로부터 ‘벗어나다’입니다. 

②뤼트론. ‘뤼트론은 2회 사용되었는데, 개역개정역은 모두 ‘대속물’로 번역했습니다.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마 20:28, 막 10:45). 이 두 구절에서 ‘뤼트론’은 속량을 위해 사용된 도구라는 것 외에, 어떻게 속량하는지-덧입는 의인지, 죄의 종노릇에서 벗어나게 하는 의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③안틸뤼트론. 단 1회 사용되었는데, ‘대속물’로 번역했습니다(딤전 2:6).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 이 구절에서도 안틸뤼트론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지는 밝히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④뤼트로시스. ‘뤼트로시스’는 3회 사용되었는데, 개역개정역은 ‘속량’으로 두 번, ‘속죄’로 한 번 번역했습니다(히 9:12).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눅 1:68),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2:38),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히 9:12). 그 백성을 속량한다는 것과 예루살렘을 속량한다는 것은 이방인의 압제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룬다.”(히 9:12)에서 ‘속죄’는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겠느냐”(14절)에서 보듯, 죽은 행실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⑤아폴뤼트로시스. ‘아폴뤼트로시스’는 모두 10회 사용했는데, 개역성경은 이를 ‘속량’으로 7회(눅 21:28, 롬 3:24, 8:23, 엡 1:7, 14, 골 1:14, 히 9:15), ‘구원’으로 2회(고전 1:30, 엡 4:30), ‘풀려남’으로 1회(히 11:35) 번역했습니다. ‘아폴뤼트로시스’가 ‘속량’으로 번역된 일곱 개의 구절은 “너희 속량이 가까웠느니라”(눅 21:28),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롬 3:24), “속으로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롬 8:23),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엡 1:7),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1: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 1:14),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히 9:15)입니다. 또 ‘구원’으로 번역된 두 구절은 “예수는... 우리에게 ... 구원함이 되셨으니”(고전 1:30),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엡 4:30)입니다. 그리고 ‘풀려남’으로 번역된 구절은 “심한 고난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니”입니다. 이처럼 ‘아폴뤼트로시스’는 압제에서 벗어남, 종노릇에서 벗어남, 탈선으로부터 벗어남, 구금된 상태에서 벗어남을 뜻합니다. 

⑥뤼트로테스. ‘뤼트로테스’는 1회 사용했는데, 개역개정역은 이를 ‘속량하는 자’로 번역했습니다. “모세를 하나님은 ... 관리와 속량하는 자로서 보내셨으니”(행 7:35). 이는 뤼트로테스가 이스라엘 자손을 바로의 종노릇에서 ‘벗어나게 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뤼트로오’를 비롯한 동일 어군(語群)에 속한 위 여섯 개의 단어가 사용된 성경 구절들을 조사해 본 결과 우리는 ‘뤼트로오’와 뤼트로오에서 파생된 어군에 속한 단어들에 대해서 다음 두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1)‘속량하다’(뤼트로오)란 단어의 기본 의미는 ‘벗어나다’이며, 성경은 이 단어들을 “종노릇에서 벗어나다.”(행 7:35) “어떤 나라나 도시가 이방인의 압제에서 해방되다.”(눅 2:38) “죄의 종노릇에서 벗어나다.”(벧전 1:18) “구금된 상태에서 풀려나다.”(히 11:35)란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이는 ‘뤼트로오’와 동일 어군에 속한 단어들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가 ‘벗어나다’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2)속량을 위해 쓰인 것을 ‘속량물’ 혹은 ‘대속물’이라 합니다. 속량물로 쓰인 것은 사람, 짐승, 돈 등 다양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속량물로 언급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막 10:45, 딤전 2:6). 주목할 것은 속량을 위해 반드시 속량물이 필요한 것은 아니어서 속량물 없이 속량이 이루어지기도 했습니다. 그 한 예는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속량될 때입니다(출 6:6).  

(출 6:6)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내며 그들의 노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여러 큰 심판들로써 너희를 속량하여(70인역은 속량을 헬라어 ‘뤼트로오’로 번역했다)  

  이는 ‘속량’을 “몸값을 지불하고 자유하게 하다.”라는 의미라고 하는 것이 부적절하며, 단순히 ‘벗어나다’라고 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약성경에서 ‘뤼트로오’의 어군에 속한 단어들을 살펴본 결과 “예수께서 우리를 속량하셨다.” 혹은 “예수께서 우리를 대속하셨다.”는 말씀은 유대적 배경을 가진 이들은 ‘압제로부터 벗어나게 하다’란 의미로 사용했고(눅 1:68, 2:38), 사도들은 ‘죄의 종노릇에서 벗어나게 하다.’란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자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게 되었다.”(롬 3:24)는 말씀을 근거로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덧입는 의라고 하는 것은 전혀 근거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속량하셨다.”는 말씀은 죄의 종노릇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하여 다시는 죄 가운데 살지 않게 하신 것을 의미하고, “예수께서 우리의 대속제물이 되셨다.”는 것은 우리를 죄의 종노릇에서 벗어나게 하는 제물이 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2. 속량을 ‘죄 사함’으로 설명한 구절과 갈라디아서 1장 4절 문제

  “예수께서 우리를 속량하셨다.”는 것은 이신칭의가 거짓 교리라는 것을 드러낸다고 할 때, 반론을 제기하는 이들이 주로 사용하는 구절이 에베소서 1장 7절과 골로새서 1장 14절, 그리고 갈라디아서 1장 4절입니다. 개역개정역은 두 곳에서 속량을 ‘죄 사함’으로 설명하며(엡 1:7, 골 1:14), 갈라디아서 1장 4절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이를 들어 속량은 ‘죄의 용서’를 의미하고, 이로 인해 의가 덧입혀지거나 전가된다는 이신칭의의 교리는 진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들에서 사용한 속량과 대속은 이신칭의의 교리를 지지하지 않습니다. 

1)속량 곧 죄 사함

(엡 1: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골 1: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개역개정역이 속량을 ‘죄 사함’으로 번역한 이 두 구절의 ‘죄’의 헬라어 표기는 서로 다릅니다. 먼저 에베소서 1장 7절의 ‘죄 사함’에서 ‘죄’는 ‘파랍토마’로 본래 ‘옆으로 미끄러진’ 즉 ‘탈선’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사함’으로 번역된 ‘앞헤시스’는 ‘용서’의 의미가 있긴 하지만, ‘속박이나 구속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또 골로새서 1장 14절의 ‘죄 사함’의 ‘죄’는 ‘하마르티아’로 ‘과녁에서 빗나가는 것’ 즉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삶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이 ‘속량’을 죄 사함으로 설명한 두 곳의 의미는 각각 ‘탈선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엡 1:7)과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삶으로부터 벗어나는 것’(골 1:14)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이 의도한 것은 ‘속량’ 즉 죄의 종노릇에서 벗어나는 것‘은 탈선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삶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으로 의롭게 변화되어 의의 열매를 맺게 된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속량을 죄 사함으로 설명한 이 두 구절을 근거로 이신칭의의 교리를 옹호하는 것은 잘못이며, 오히려 덧입는 의에 의한 칭의의 교리를 부정할 뿐입니다.

2)갈라디아서 1장 4절

(갈 1: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개역개정역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주신 목적이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란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주신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로 이 세대의 악한 삶으로부터 건져내서 선하고 의로운 삶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를 위해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가 무엇을 의미하느냐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1장 4절의 헬라어 원본에는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에서 ‘대속’이란 단어가 없고, 단지 “우리 죄(하마르티아)를 위하여” 뿐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삶을 사는 우리를 위하여 그리스도는 자기 몸을 주셨고, 이로 인해 우리는 이 악한 세대에서 건짐을 받습니다. 그리고 속량 혹은 대속이 ‘벗어나다’란 뜻이므로 “우리 죄를 대속하다.”란 표현은 어법(語法)에도 맞지 않습니다. “우리를 (죄에서) 대속하다”라고 할 수는 있어도 “우리 죄를 대속하다”라는 표현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헬라어 원본이 “우리 죄를 위하여”라 한 것을 개역개정역이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라고 하여 ‘대속하다’를 첨가한 것은 ‘대속하다’란 단어의 의미를 오해한 것으로부터 온 큰 잘못입니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서 1장 4절 역시 이신칭의 교리의 성경적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이신칭의의 교리는 사도 바울이 그의 서신 전체에서 말하는 속량과 의롭다 하심의 의미와는 전혀 다릅니다. 

3. 사도 바울이 사용한 ‘속량하다’와 ‘의롭다 하심을 얻다’의 뜻

  로마서 6장 1-11절을 보면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는 것을 어떤 의미로 사용했는지를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 두 용어에 대해 사도 바울이 말한 것과 종교개혁자들의 주장을 비교해 보면 현저한 차이가 납니다. 

(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10)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사도 바울은 이 단락에서 다음 세 가지, 즉 속량의 의미와 속량의 방법, 그리고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보여줍니다.

1) 속량의 의미

  속량은 죄에게 종노릇하던 사람이 죄에서 벗어나 더 이상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는 것입니다.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속량을 받은 사람들은 더 이상 죄 가운데 살지 않고(1-2절), 새 생명 가운데서 하나님을 향해 살게 됩니다(4, 11절). 종교개혁자들이 속량을 예수께서 죽으심으로 우리가 범한 죄 값을 대신 치러주신 것, 혹은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켜 드림으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서 벗어나게 한 것으로 이해한 것과는 매우 다릅니다. 

2) 속량의 방법

  속량의 방법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을 통해서입니다.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습니다(6절). 그러므로 속량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습니다(롬 3:24). 교부시대로부터 종교개혁자들에 이르기까지 보상설에 기초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 값을 치러주셨다.” 혹은 만족설에 근거하여 “죄 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죄로 삼아 내어주심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켜드렸다.”고 하는 것은 성경을 오해한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속량의 방법을 이해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 죄의 종노릇하는 우리의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어 하나님을 향해 살게 합니다. 이것이 속량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속량물 또는 대속제물이 되셨습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게 하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복음입니다(롬 4:25).

3)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의 의미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는 것을 종교개혁자들은 덧입는 의와 전가되는 의로 말미암은 칭의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을 ‘죄에서 벗어나 다시는 죄의 종노릇하지 않게 된 것’이라고 했습니다(7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하나님이 복음의 능력으로 죄에서 벗어나 실제로 의롭게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의는 덧입는 의나 전가되는 의로 의롭다 함을 얻은 ‘칭의’와 전혀 다릅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를 언제나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갈 1:20, 5:24, 6:14). 예수님이 우리 죄 값을 대신 치러주셨으므로 그를 믿는 자는 의가 덧입혀져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이신칭의의 교리는 사특한 거짓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를 선한 일을 하는 사람으로 새로 지으심을 받게 합니다(엡 2:5, 10). 종교개혁자들이 칭의로 말미암아 “실제는 죄인인데 의인으로 인정받는다.”고 주장한 것은 거짓말입니다. 이신칭의의 교리는 죄 가운데 거하면서도 나는 구원 받았다고 믿는 교인들을 양산하고, 거룩한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죄의 종노릇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여 교회를 죄인의 소굴이 되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는 사악한 거짓말입니다. 거짓말에 속아서 그 말을 내 것으로 말하는 사람은 사탄의 일꾼이 될 뿐입니다(요 8:44).  


신부동교회 강금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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