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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나님의 의 (2) 갈라디아서가 법정적 칭의를 말하는가 2018-10-02
작성자 강금성 조회수: 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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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의란 무엇인가(2)

제2장 갈라디아서가 법정적 칭의를 말하는가?


  법정적 칭의란 종교개혁 이래로 개신교가 이해해 온 칭의론을 말하는 것인데, 김세윤은 법정적 칭의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은 죄인들인 우리 모두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징벌을 받은 것이요, 그리하여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버린 대속의 제사였다.’라고 이해하는데 근거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 이 그리스도 사건, 구원의 사건을 선포하는 것이 ‘복음’인데, 이 복음을 믿으면 그리스도의 대속의 제사가 우리에게 효력을 발생해서 우리가 무죄 선언을 받고 의인이라 칭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루터(M. Luther)는 이 법정적 칭의가 가장 잘 나타난 성경 중 하나를 갈라디아서라 했습니다. 그는 갈라디아서를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갈라디아서는 나의 서신이다. 나는 이 서신과 결혼하였다. 이것은 나의 Catharina von Bora(루터의 아내 이름)이다.”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가 법정적 칭의라는 것이 갈라디아서에 잘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브레데(W. Wrede)와 슈바이처(A. Schweitzer) 등은 이러한 개신교의 전통적 칭의론에 대해서 강력히 비판했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개신교의 칭의론으로 복음을 설명하는 경우가 바울의 서신들에만 나오는데, 그것도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그리고 빌립보서 3장, 이 세 곳에서만 나온다는 것입니다. 슈바이처는 “바울의 복음의 주된 분화구는 ‘그리스도-신비주의’이고, 칭의론은 그 분화구 안에 부차적으로 형성된 2차적 분화구이다.”라고 했습니다. 즉 사도 바울이 말한 복음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리스도와 신비한 연합이 이루어지고,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나의 사건이 된다. 그 결과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음으로써 죄의 종노릇에서 벗어나고,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가 되어 의의 종노릇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롬 6:1-11 참고). 반면 현재 개신교가 믿고 있는 것과 같은 “칭의론은 바울이 자기의 이방 선교를 방해하는 유대 율법주의자들과 싸우기 위해서, 즉 그들이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을 지키라고 요구하는 것을 배격하기 위해 고안한 논쟁용 교리이다. 그래서 칭의론은 이방 선교 문제를 다루는 갈라디아서, 로마서, 빌립보서 3장에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슈바이처도 갈라디아서가 법정적 칭의를 말한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최근 바울의 새관점 학파에 속한 제임스 던(James D.G. Dunn)과 톰 라이트(N. T. Wright), 그리고 김세윤 사이에 칭의론 논쟁이 활발합니다. 그들 사이의 논의의 핵심 쟁점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바울의 칭의론이 언제 발생했느냐는 것입니다. 김세윤은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이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행 9장) 바울의 복음, 즉 칭의론이 기원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던과 라이트는 그보다 훨씬 후인 수리아 안디옥 교회에서 다툼이 일어났을 때(행 15장) 기원된 것으로 봅니다. 또 하나의 쟁점은 김세윤은 “칭의론이 바울 복음의 핵심이다.”라고 하는데, 새관점 학파는 “칭의론은 바울의 복음에서 부차적인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김세윤과 바울의 새관점 학파에 속한 이들은 뜨거운 논쟁에도 불구하고, 갈라디아서에 바울의 칭의론, 즉 법정적 칭의의 개념이 나타난다는 것은 모두 인정합니다. 

  결국 갈라디아서에 법정적 칭의의 개념이 나타난다는 것에 대해서는 거의 모든 이들이 인정합니다. 그러나 저의 관찰 결과는 갈라디아서 어디에도 법정적 칭의 개념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만일 갈라디아서가 법정적 칭의를 말한다면 갈라디아서에 다음 두 가지 내용이 반드시 나타나야 합니다. 첫째,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이 죄인인 우리 모두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징벌을 받은 것이요, 그리하여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버린 대속의 제사였다.”라는 내용입니다. 둘째, “위 내용(개신교는 이를 ‘복음’이라 한다)을 믿으면 그리스도의 대속의 제사가 우리에게 효력을 발생해서 우리가 무죄 선언을 받고 의가 덧입혀짐으로 의인이라 칭함을 받는다.”는 진술도 나타나야 합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거짓 교사들에 의해 “의롭다 하심을 얻고,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얻기 위해서는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강력한 권고를 듣고 있었습니다. 이에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통해 할례나 무할례는 아무 것도 아니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으며,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전체 6장으로 된 갈라디아서는 다음과 같이 다섯 개의 단락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인사말(1:1-5), 주장(1:6-2:21), 주장에 대한 논증(3:1-4:11), 권면(4:12-6:10), 서명(6:11-18). 이 다섯 개의 단락에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한 언급이 한 번씩 언급됩니다(1:4, 2:20, 3:13, 5:24, 6:14). 

(1: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이 다섯 구절 중 2:20, 5:24, 6:14은 갈라디아서가 법정적 칭의를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나는 죽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게 하는 것’(2:20)이고, ‘내 육체와 함께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며(5:24), ‘세상이 나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못 박히는 것’(6:14)입니다. 이 세 구절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를 실제로 의롭게 하는 것이지 법정적 칭의를 말하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가 검토해야 할 것은 ‘나머지 두 구절(1:4, 3:13)이 과연 법정적 칭의를 의미하는가?’입니다. 각 단락의 내용과, 그 단락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한 구절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 인사말(1:1-5)

  첫째 단락인 1:1-5절은 갈라디아서의 인사말에 해당됩니다. 이 단락에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됨이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에 의해 된 것이라 하고,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빈 후,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가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바울이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는 이유는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악한 세대’란 타락하여 죄의 종노릇하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개역개정역 성경은 ‘우리 죄를 위하여’(휘펠 톤 하마르티온 헤몬)를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로 번역했는데, ‘대속하다’란 단어는 헬라어 원문 성경에는 없으므로 개역 성경처럼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습니다. 

  4절의 ‘우리 죄’는 다음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 죄’를 ‘우리가 범한 죄’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 의해 “우리가 범한 죄에 대한 벌을 대신 받으려고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주셨고, 우리를 죄에 대한 형벌에서 벗어나게 하셨다.”란 교리를 만들어 냈습니다. 이것이 개신교의 입장이고, 개역개정역은 이 입장을 반영해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라고 번역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 죄’는 ‘우리 안에 있는 죄’를 가리킨다는 입장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죄를 이 의미로 종종 사용했습니다. 로마서 7:14-20절을 보겠습니다. 

(롬 7:14-20)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15)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16)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17)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20)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14절을 보면, “나는 죄 아래에 팔렸다.”고 합니다. 내가 죄 아래에 팔려 죄의 종노릇한다는 것입니다. 17절에는 “내 속에 죄가 거한다.”고 했습니다. 나는 선을 원하지만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합니다. 그 이유는 내 속에 죄가 거하기 때문입니다. 20절에도 내가 원하지 않는 그것을 행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고 합니다. 이 죄는 ‘우리가 범한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거하면서 우리로 악을 행하게 하는 죄입니다. 

  갈라디아서 1장 4절의 ‘우리 죄’는 다음 두 가지 이유로 ‘우리가 범한 죄’라기보다 ‘우리 안에 있는 죄’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첫째 이유는 같은 구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주신 목적이 ‘우리를 이 악한 세대에서 건지시려고 자기 몸을 주셨다.’는 내용과 조화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받을 형벌을 대신 받으신 것으로는 형벌을 받는 것에서는 건질 수 있지만,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질 수는 없습니다. 둘째 이유는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해서 말할 때 언제나 나의 죽음과 관련된 것으로 말하며, 이를 통해 우리를 죄의 종노릇하지 않게 하는 것으로 말하기 때문입니다(2:20, 5:24, 6:14). 그리스도는 내 속에 거하며 악을 행하게 하는 이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죄의 종노릇에서 벗어나 이 악한 세대에서 건짐을 받습니다. 

2. 바울의 주장(1:6-2:21)

  인사의 말(1:1-5)을 건넨 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 자기의 주장을 펼칩니다. 그가 주장하는 것은 다음 세 가지입니다(1:6-2:21). 첫째, 다른 복음은 없다. 만일 누군가 다른 복음을 전하면 우리나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 할지라도 저주를 피할 수 없다고 합니다(1:6-10). 둘째,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며, 교회에서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인정한 것이다(1:11-2:14). 셋째,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2:15-21). 이 세 가지 중 핵심은 셋째 것으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계시로 받은 복음이 바로 이것이며, 이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이는 저주를 받게 될 것이라 했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 때문입니다. 바울은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2:21)고 함으로써, 의롭게 되는 것을 그리스도의 죽으심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앞 절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의 죄에 대한 형벌을 그리스도께서 대신 받기 위해서였다(보상설)거나, 우리 대신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켰다(만족설)고 하는 전통적인 교회의 입장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바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나는 죽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게 함으로써 실제로 의롭게 되도록 합니다.   

3. 논증(3:1-4:11)

  셋째 단락인 3:1-4:11은 앞 단락에서 바울이 주장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논증합니다. 그리고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고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바울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다음 세 가지를 통해 논증합니다(3:1-18). 

  첫째, 갈라디아 교인들의 경험입니다.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듣고 믿음으로’였습니다(3:1-5). 성령은 하나님의 영으로,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부어주는 영입니다.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복음을 듣고 믿을 때 성령이 그들에게 임했습니다. 그때 그들은 율법을 알지도 못했고, 할례를 받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이는 사람이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이제 그들이 육체에 할례를 받고자 하는 것은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려는 어리석은 일일 뿐입니다. 

  둘째, 성경의 근거입니다.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3:6-14).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이제 믿음으로 말미암는 자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습니다. 

  셋째, 일반적인 상식입니다.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에게 약속한 것은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는 것입니다(참고, 창 22:18). 바울은 ‘네 씨’를 그리스도라 하고, 천하 만민이 ‘네 씨’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는 이 약속은 그보다 430년 후에 주어진 율법에 의해 폐기될 수 없다고 함으로써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을 부정합니다(3:15-18).

  바울은 논증 후에 “그렇다면 율법은 왜 주신 것인가?”에 대해서 말합니다. 율법은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입니다. 율법은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입니다. 또 율법은 하나님의 약속과 반대되는 것도 아닙니다. 율법은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초등교사의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에도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것은 유업을 이을 아들이 종노릇하려는 것과 다름없습니다(3:19-4:11).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고자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이처럼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논증하는 과정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저주를 받으심으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루터(M. Luther)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해석했습니다. 

  “그리스도 당신은 저의 죄요 저의 저주이십니다. 아니 오히려 제가 당신의 죄, 당신의 저주, 당신의 죽음, 당신의 하나님의 분노, 당신의 지옥이며, 반대로 당신은 저의 의, 저의 복, 저의 생명, 저의 하나님의 은총, 저의 하늘이십니다.”

  이는 루터가 ‘율법의 저주’를 ‘죄의 저주’와 동일한 것으로 여기고, 나의 죄가 그리스도께 전가되어 그리스도께서 대신 저주를 받고 죽었으며, 대신 그리스도의 의가 나에게 덧입혀져 내가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루터의 이 해석은 다음 두 가지 문제로 인해 올바른 해석이라 하기 어렵습니다. 첫째로 루터의 해석은 갈라디아서의 흐름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3:1-18의 주제는 사람이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논증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단락에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자들은 의롭다 함을 얻고, 아브라함의 복을 받게 됨을 말합니다. 즉 후사가 됩니다. 하지만 율법으로 말미암는 자들은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고 후사가 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이 율법의 저주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이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하여 의롭다 함을 얻고 후사가 되도록 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도 남편과 사별한 아내의 비유를 언급하며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한다는 것을 말했습니다(7:1-6). 

(롬 7:4-6)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5)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우리를 율법에서 속량한 것입니다. 율법에 대하여 죽은 우리는 이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의 소속을 바꾸고 삶을 바꾸는 것이지, 의를 덧입혀 주는 것이 아닙니다. 

  둘째로 루터의 해석은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갈라디아서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고(2:20), 내 육체와 함께 정욕과 탐심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성령으로 따라 행하게 하며(5:24-25), 세상이 나에 대하여 못 박히고 내가 세상에 대하여 못 박히게 하여 더 이상 세상의 종노릇하지 않게 합니다(6:14).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언제나 ‘나의 죽음을 위한 것’입니다. 이 죽음을 통해 우리는 죄의 종노릇에서 벗어나 의의 종노릇하고, 율법에서 벗어나 그리스도 안에서 살게 하며, 세상에 얽매어 사는 것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대하여 살게 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루터가 말한 바와 같이 나의 죄가 그리스도의 죄가 되고, 그리스도의 의가 나의 의가 되는 전가와 교체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루터는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죄의 저주를 대신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석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 맺는 삶 대신에 덧입는 의로 왜곡함으로써 갈라디아서의 가르침과 전혀 다른 교리를 만들었습니다. 

4. 권면(4:12-6:10)

  이 단락에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게 두 가지를 권면합니다. 하나는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것입니다(4:12-5:12). 갈라디아 교회는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을 따라 할례를 받고자 했습니다. 이는 그들이 다시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것’이며(4:21), 종의 멍에를 메는 것입니다(5:1). 바울은 우리가 율법 아래 있으면 유업을 얻지 못하고(4:21-31),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다는 것을 일깨우며(5:2-12), 할례 받고자 하는 마음을 스스로 베어버릴 것을 권면합니다(4:12, 5:12).

  다른 하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게 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권면합니다(5:13-6:10). 육체를 따라 살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얻지 못합니다(5:16-21). 사람은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둡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둡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따라 행하고, 모든 이에게 선을 행하도록 권면합니다(6:1-10). 육체의 소욕을 따라 행하지 말고 성령의 소욕을 따라 행할 것을 권면하는 중에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해서 말합니다.

(5:24-25)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슬러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5:17).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 육체 안에 있는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더 이상 육체의 소욕을 따라 행하지 않고, 성령을 따라 행하도록 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의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우리가 더 이상 육체를 따라 살지 않도록 하는 것이지, 루터의 주장처럼 우리가 범한 죄를 그리스도께서 대신 지고 그 죄에 대한 벌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5. 바울의 서명(6:11-18)

  이 단락은 갈라디아서의 다른 부분과는 다르게 바울이 큰 글자로 직접 쓴 것입니다. 이에 따라 이 단락을 바울의 서명이라고 부릅니다. 성경학자들은 바울의 서명(6:11-18)이 갈라디아서 내용들을 요약하는 것으로 여겨 왔습니다. 베츠(Hans Dieter Betz)는 이 단락이 갈라디아서의 해석을 위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지적하며, “그것은 그 서신 전체에서 바울의 주요 관심사들에 대한 이해를 위한 해석상의 단서들을 포함하며 그 사도의 의도들에 대한 해석학적 열쇠로 삼아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서명에서 바울은 할례를 받고자 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는 박해를 면하려 하는 것과 육체를 자랑하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 자신은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가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그 첫째 이유가 6:14에 나타나 있습니다.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그리스도의 죽으심, 곧 십자가는 세상이 나를 대하여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못 박힙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세상이 더 이상 나에 대해 권리를 행사할 수 없게 하고, 나 역시 세상의 종노릇하지 않게 합니다. 

  둘째 이유는 우리를 새로 지으심을 받게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바른 복음과 다른 복음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새로 지으심을 받게 하는 것’을 제시합니다. “(6: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새로 지으심을 받게 하는 것을 기준으로 볼 때 할례나 무할례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할례를 받도록 하는 이들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며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를 새로 지으심을 받게 합니다(2:20, 5:24, 6:14). 루터가 말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에게 전가되어 그리스도께서 대신 저주를 받고, 이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덧입혀짐으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하는 내용은 갈라디아서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루터의 말하는 복음이나 개신교에서 믿고 있는 복음은 덧입히는 것으로 새로 지으심을 받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복음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의를 법정적 칭의라고 주장하는 것은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것이며, 자신과 듣는 이들을 저주 아래 두게 합니다. 

맺는 말

1. 갈라디아서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나의 죽음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내가 죽고(2:20), 내 육체와 함께 정욕과 탐심이 십자가에 못 박히며(5:24), 세상이 나에 대하여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못 박힙니다(6:14). 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나에게 미치는 것은 이 악한 세대에서 나를 건시시고(1:4),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게 하고(2:20), 성령을 따라 살게 하며(5:25), 더 이상 세상의 종노릇하지 않고 하나님께 대하여 살게 합니다(2:19).

  갈라디아서에 법정적 칭의가 나타난다는 것이 성립하려면 갈라디아서에 두 가지 내용이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는 그리스도께서 내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형벌을 받으셨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인해 내게 의가 덧입혀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살펴본 대로 갈라디아서 어디에도 이 두 가지 진술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갈라디아서는 법정적 칭의를 말하지 않습니다. 갈라디아서가 법정적 칭의를 말한다고 하는 것은 갈라디아서의 가르침을 부정하는 것이며, 자신에게 저주를 불러오는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2. 참된 복음은 새로 지으심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다른 복음을 따르는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 다른 복음은 없고, 다른 복음을 전하는 이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1:6-10). 갈라디아 교회가 따르고 있는 ‘다른 복음’은 할례를 받는 것입니다(6:12-13). 그런데 사도 바울은 할례와 다른 복음을 말하는 중에 참된 복음은 새로 지으심을 받게 하는 것이며, 새로 지으심을 받게 하지 못하는 할례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6:15). 바울이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안다.”고 천명한 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나는 죽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게 함으로써 우리를 새로 지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루터가 창안하고, 우리 개신교회가 받아들인 이신칭의의 교리는 우리를 새로 짓지 못하고, 따라서 다른 복음, 즉 우리로 저주를 받게 하는 거짓 복음일 뿐입니다.


신부동교회 강금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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