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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캄보디아 김득수 선교사의 학교 사역 2017-07-15
작성자 홍보실 조회수: 1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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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세의 나이에 캄보디아 오지로 선교 떠난 선교사가 있다. 그는 바로 캄보디아에서 사역 중인 김득수 선교사. 예순을 이틀 앞둔 2007년 12월 29일. 김득수 목사와 이옥란 사모는 캄보디아로 떠났다. 김 목사는 한국에서 교회 두 곳을 개척하면서 35년간 쉼 없이 목회를 펼친 성실한 목회자였다.

김 목사는 신도시에 큰 교회를 지어 목회를 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믿었다. 목회는 안정적으로 전개됐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기도 중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네가 정말 나를 위해 살았느냐? 이것이 네가 내게 해 줄 전부니?” 김 목사는 엎드려 한참을 울었다. 그리고 그는 신도시의 안정된 목회 이상의 무엇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주님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 가려는 마음이 생겼다. “주님이 가라는 어디든지 가겠습니다. 그곳에서 설교자가 아닌 그리스도인으로 살겠습니다”

운명과도 같이 캄보디아 오지 땅크라상이 부부의 눈에 들어왔다. 이 사모가 인터넷을 통해 캄보디아 정부가 시골마을에서 한글을 가르칠 봉사자를 구한다는 모집 공고를 접했다. 이들은 주한 캄보디아 대사관에서 면접을 본 뒤 한국어 교사로서 캄보디아 입국 허락을 받아냈다. 늦깎이 선교는 이렇게 시작됐다. 부부는 그곳에서 생을 마감할 작정으로 살림살이와 책 전부를 주위에 나눠줬다.

2008년 1월부터 땅크라상의 절 안에 있는 학교에서 스무 살 남짓의 청년들을 가르쳤다. 부부는 명콤비였다. 이 사모가 문법을 가르치면 김 목사는 한국어 노래로 흥을 돋웠다. 배고픈 학생들에게 빵과 물도 주면서 신뢰를 쌓아갔다. 1년 뒤 부부는 폐교에서 교실 3개짜리 한글학교를 열었다. 40명으로 시작한 수업은 다음 해 100명으로 늘었다. 셋집을 얻어 교회도 개척했다. 학생들은 자연스레 예배당을 찾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지독한 가난으로 부정적인 말을 입에 달고 살던 아이들이 변하기 시작했다. 한글학교 졸업생 4명이 대학에 입학했다. 학생 중 65명은 세례를 받았다. 땅크라상 지역에서는 처음 벌어지는 일들이었다. 희망은 더 큰 꿈을 꾸게 했다. 땅크라상의 아이들은 비용 때문에 대학교 입학을 주저했다. 예배당에 모인 학생들이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아예 대학을 지을 수 있게 해 주세요. 길가에 있는 크고 좋은 땅을 저희에게 허락해 주세요” 그 후 믿음의 역사는 곳곳에서 나타났다. 캄보디아 정부로부터 바티에이란 지역 1만8000평의 부지를 무상으로 기증 받았다. 그는 이 곳에 바티에이국제대학교를 세웠다.

서울 방화동 성지교회는 대학 건립기금으로 25만 달러를 후원했다. 또 교회를 짓는데 보태달라며 사망 보험금 1만 5000달러를 전달한 미망인도 있었다. 믿음의 기업인 엔데오의 남정복 회장과 직원들도 바티에이국제대학교 설립에 사명으로 받아들여 도왔다. 그리고 지금은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세우신 바티에이국제대학교가 해를 거듭하면서 건강한 모습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다. 김 선교사는 “하나님의 역사로 죽음의 상징이었던 ‘킬링필드’가 이제는 생명이 약동하는 ‘힐링필드’로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증인입니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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