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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그전에도 그랬었는데...그 나물에 그 밥 2021-08-04
작성자 이재섭 조회수: 4290
첨부파일   기고문.hwp |  
  “그전에도 그랬었는데....그 나물에 그 밥”
(글이 길다/A4 9페이지. 요약해서 올린다. 자세한 원문을 보고 싶으면 첨부 파일을 참조하기 바란다)
이재섭 목사 (대전지방회장, 대전중앙교회 담임)

지금은 온 국민이 오랜 팬데믹으로 지쳐있다. 백신을 맞으면 조만간 우리의 일상이 어느 정도 복귀될 것으로 예상을 했지만, 변종이 발생하여 그것도 기대하기가 어려워졌다. 거기에다가 이번 여름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려 안타깝게도 온 국민은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다. 시국이 어려운 가운데 팬데믹 현상으로 2주간 연기된 가운데 총회본부에서 덕산 리솜으로 장소를 옮겨 제2차 실행위원회가 소집되었다. 최근 코로나 재확산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총회 본부는 실행위원회를 일차 연기한 후, 장소를 덕산 리솜으로 변경하여 개최하였다. 이런 시기에 2차 실행위원회가 열린 만큼 기대가 컸었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했던가. 어느날 아내와 이야기하는 도중에 갑자기 ‘아닌 것은 아닌 것이여, 이건 아니라고 봐’라고 말한다. 한 방송국 드라마의 대사 중 하나였던 것이다. 이는 드라마 대사가 아니다. 우리 교단 현실에서도 “아닌 것은 아닌 것이라”라고 말하고 싶은 심정이다.
교단 최고 의결기관은 실행위원회이다. 이 회의에서 교단의 중대한 일들이 논의되고 결의된다. 따라서 교단의 실행위원회 회원이 된다는 것은 특별한 사명을 가지게 된다. 그리하여 저는 100회기 총회에 특별한 마음을 가지고 회의에 참석한다. 지방에서 목회하고 있지만, 그 누구보다도 교단 예성을 사랑하고 총회의 임원을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또한, 우리 교단의 모토인 ‘여호와께 성결’이란 문구를 무척 좋아한다. 
실행위원회가 화합의 자리, 정책의결의 자리, 소통과 공감의 자리, 강하고 건강한 교단을 세워가는 자리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간의 과정에서 몇 가지 느낀 점과 개선 방안을 제언하고자 한다. 

1. 다시 생각하는 ‘그전에도 그랬었는데’의 문제
회의 중에 안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소위 ‘전에도 그랬는데, 전에도 그랬기 때문에, 그러니 이번에도 그렇게 하자’는 말들을 하게 된다. 흔히 ‘통상 관례에 따른다’는 말을 한다. 물론 ‘통상 관례에 따른다’라는 말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회의에서 통상 관례에 따르는 것은 필요한 절차로 인정한다. 그렇지만 다시 생각해야 할 것은 법과 규정을 어기거나 교묘하게 비껴가려는 사안에서 통상 관례를 언급하는 일이다. 더욱이 개인의 유익을 위해서나 진영의 논리에서 이러한 논리가 적용된다면 정말로 경계해야 한다. 잘못된 인용이나 적용은 바로 잡아가면서 해야 한다. 내게 유익이 좀 덜 하더라도 대의를 위해 희생할 줄 알아야 한다. 전체 공동체의 건강한 이익을 내다볼 줄 알아야 한다. 
실행위원회 한 사람으로서 100회기 총회장과 임원들의 역할에 대해 기대가 컸다. 1차 실행위원회 정책수련회 때 총회장의 비전과 정책을 듣고서 준비된 총회장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힘껏 도우려고 결심했었다. 그러나 실행위원회가 출범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 기대가 실망이 되어 솔직히 마음이 슬프다. 2차 실행위원회 때의 모습은 나에게 너무나 큰 충격적이었다. 적어도 내 식견으로서는 있어서는 안 되는 일들이 벌어졌다. 그 상황에서 있었던 일과 관련하여 실행위원 한 사람으로 책임을 통감한다. 이제라도 헌장에 어긋나는 사례와 관례, 통례들은 과감히 청산하고 오직 헌장에 입각한, 헌장에 의한, 헌장을 위하여, 헌장을 준수하는 실행위원회가 되기를 희망해 본다. 이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마 9:17)

2. 다시 생각하는 ‘그 나물에 그 밥’
100회기 총회의 슬로건은 아직도 유효하다. “은혜의 한 세기!, 변혁의 새 시대!” 슬로건처럼 진정으로 변화와 혁신의 새 시대를 맞아야 한다. 그런데 이 슬로건이 공허한 메아리가 될 것같은 마음이 드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이런 우려는 실행위원회 초기부터 상생과 협력보다는 진영 논리에 빠져드는 모습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 모두가 교단 발전을 위한 중대사에서는 진영 논리를 벗어나 서로 양보하고 배려하면서 협력적 파트너가 되어야 한다. 특히 코로나19로 어려운 이 시기에는 실행위원회 임원부터 하나로 나아가야 한다(요 17:11,17) 
부총회장 후보가 되어 선거운동하러 지방회 오시면 나는 그분들에게 꼭 “정치와 신앙은 하나입니까 아니면 별개입니까” 라는 질문을 한다. 지금까지 나는 모든 후보자로부터 별개라는 소릴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런데 현실 정치에서 들려 오는 말은 “정치와 신앙은 별개이다”라는 말이다. “여호와께 성결”을 가르치면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된다.
교회 성도들이 믿음과 삶을 분리해서 살거나 교회와 세상을 분리하여 이분법적으로 살 때 어떻게 권면할 수 있을까. 현실 정치 현장에서 정치와 신앙은 별개로 말하는 분들에게 힘주어 “삶 자체가 신앙이 되어야 한다”라고 외치고 싶다. 어찌 정치와 신앙이 별개가 될 수 있겠는가? 절대 그럴 수 없다. 행함이 없는 신앙 자체는 죽은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지 않는가. 주님이 사데교회에 주신 책망을 기억해야 한다(계 3:1). 사데 교회는 라오디게아 교회와 더불어 칭찬이 없는 교회였다. 사데교회는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상태였다. 사데교회에 주신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경종을 주는 말씀이다(마 7:21-23, 빌 2:12)

100회기 총회장께서 “분열에서 통합으로, 계파에서 화합으로, 자리에서 은사자로, 불통에서 소통으로, 의견에서 정책으로, 독식에서 배분으로, 안주에서 비전으로, 정체에서 부흥으로...”를 강조했다. 이제서야 새롭게 발견한 것이 있다. 총회장 공약집 첫 페이지 제일 밑에 다음과 같은 감동의 글이 있었다. “성결이 길이요 성결이 진리요 성결이 생명이니 성결이 답이다.” 이에 무슨 말을 덧붙힐 수 있겠는가. 이 길로 나아갈 때 우리는 “그 나물에 그 밥”을 벗어나 혁신으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런 현실에서 “그 나물에 그 밥”이란 말을 다시 새기고 싶다. 이 말은 ‘서로 비슷한 수준이어서 별다른 점을 느끼지 못한다’는 말을 두고 한 것이다.’ 100회기 총회는 지나온 100년을 돌이켜 보고 새로운 100년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자동차의 백미러처럼 지난 과거를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서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 100회기는 더 새롭고 명확하고 확실한 가운데 나아갔으면 좋겠다. ‘그 나물에 그 밥’이란 소리가 아니라 분명 새로워지기 위해 몸부림치고 선한 것은 헤아려 취한 가운데 “역시 100회기는 달랐어. 정말 기대한 것보다 훨씬 나아. 진짜 행복했어”라는 후한 평가가 덧붙여지는 역사의 한 획을 긋는 회기가 되길 소망한다.

3. 이젠 달라져야 한다. 변화되어야 한다. 
우리가 언제까지 티격태격해야 하나? 의견 존중은 언제 안착이 되어질까? 이제 우리는 자리를 가지고 소위 딜을 한다거나, 화합을 미끼로 야합을 도모하는 일을 용납해서는 안된다. 이번 실행위원회 회의에서 언성이 높아지는 그 이유가 분명하게 목도(目睹, 무엇을 눈으로 직접 봄) 되었다. 이번 실행위원회의 진행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평가한다면 한마디로 수준이하였다. 어떤 위원은 ‘아수라장(阿修羅場난)이요 난장판이었다’하고 또다른 위원은 ‘회의에서 보여진 모습이야말로 초등학교 어린이 회의보다 못한 무질서였다’고 안타까워했다. 
앞으로 실행위원회가 솔직히 걱정이 된다. “법이요” 했기에 모든 인준 사항은 투표로 결의해야 한다. 3분의 2 이상이 아니면 결코 결의될 수 없다. 누가 내 진짜 아이인지 판결해달라고 했던 그 솔로몬의 지혜가 필요한 때가 아닌가 싶다. 이제부터라도 실행위원회가 좀 더 성숙해지고 발전된 모습으로 서로를 배려하면서 각 지방회 대표 자격으로 참여한 만큼 건강한 교단, 강한 교단, 감동이 있는 교단으로 세워가기 위해서 함께 고민해보고 싶은 것이 몇 가지 있다.

첫째, 총회장의 권위를 세워 드렸으면 좋겠다. 
권위란 내가 세우고 싶다고 해서 세워지는 것도 아니고 타인이 권위를 세워준다고 해서 진정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다. 2차 실행위원회가 끝나고 늦은 저녁, 총회장께 전화를 드렸다. 여러 가지 대화가 오고 갔지만 감동을 준 대화가 있었다. “총회장은 대외적인 일을 하고 부총회장은 대내적인 일을 했으면 하는 게 총회장의 생각이다”라는 내용이었다. 그때 “저도 꼭 그런 총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긍정적인 표현을 해 드린 적이 있었다. 
총회장은 교단의 수장(首長, 윗자리에 위치해 집단이나 단체를 지배하고 통솔하는 사람)이다. 우리 교단 총회장은 누구인가? 우리 교단을 대표하는 대표 자리이며 행정수반이고 영적지도자이다. 그렇기에 헌장에 입각한 존경과 권위에 순종하며 멋지고 건강하고 강한 감동의 교단을 만들고 세워가는 일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가 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권위와 권위주의는 다른 차원의 말이다. 실행위원회 카톡방에서 뒤늦게 확인했지만 2차 실행위원회 다음날 총회장께서 “부족하지만 총회장의 권위는 세워주셨으면 좋겠습니다.”라는 글을 올렸다. 글을 보면서 순간 2차 실행위원회에서 있었던 모습이 문뜩 떠올라 웃픈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권위는 무엇이며 권위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권위(權威)란 어학사전에 보니, (기본의미) 다른 사람을 통솔하여 이끄는 힘을 일컫는다. 다음백과 신학사전 용어 권위에 보니, “성경에서 사용하는 권위라는 말은 보통 자기가 맡고 있는 지위나 직책 때문에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한다. 이 말은 어떤 일을 하는 데 필요한 물리적인 힘이 아니라 정당함과 공정함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권위란 어떤 일을 하는데 필요한 물리적인 힘이 아니라 정당함과 공정함이 수반될 때 진정한 권위가 수반되는 것이다. 
이주형의 “평생 갈 내 사람을 남겨라”에 나오는 글이다. "참된 권위는 권위주의에서 나오지 않는다. 스스로 권위주의에 사로잡혀 권위를 찾고자 하면 독재만 있을 뿐이다. 진정한 권위는 스스로를 포기하고 낮추는 데서 생겨난다." 진정한 권위는 스스로를 포기하고 낮추는데서 생겨난다. 그래서 진정한 권위는 존중받아 마땅하다 생각한다. 내가 먼저 존중을 하게 되면 누구나 그 사람을 향해 부메랑처럼 돌아오게 될 것이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하지 않던가. 권위는 섬김의 리더십을 통해 나타나고 스스로의 인격을 통해 권위는 제고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총회장은 교단의 최고의결기관인 실행위원회를 잘 이끌고 배려하며 진정으로 잘 섬겨야 한다. 주님께서도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먼저 대접할 것”을 말씀하시며 이것이 율법이며 선지자라 하셨다. 황금률을 기억하자. 내가 먼저 대접하며 선대해 주는 데 그 누가 손가락질을 하겠는가. 인도의 성자 간디가 강조한 말이다. “지도자란 자신이 이끄는 사람들을 섬길 수 있어야 한다.” 존중받지 못한 실행위원회가 어찌 권위를 인정하며 따를 수 있겠는가. 이제부터라도 실행위원들의 발언을 무시하거나 외면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의견이 최대한 존중되어야 마땅하다. 무엇보다 관대함, 너그러움이 요구된다.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총회장은 솔선수범하여 무엇보다 헌장을 중시하며 임원회의 의견을 존중하고 실행위원회를 섬기면서 나아갈 때, 분명 실행위원들이 그 권위에 순응하리라 본다. 총회장의 권위는 온유와 겸손, 섬김과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라 사료된다. 총회장께서 사도바울(고전 11:1)처럼 이런 모습으로 본을 보여주시길 희망한다. 또한 실행위원들도 품위를 잃지 말고 삼가 언행에 조심하며 덕 세움에 힘쓰는 실행위원회를 만들어 갔으면 하는 간절한 바램을 피력(披瀝)한다. 

둘째, 임원회와 실행위원회를 같은 날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동안 수많은 실행위원들이 하나같이 외쳤던 것은 결의 안건 사항들을 미리 알려 주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이번 2차 실행위원회에 참으로 중요한 안건에 대한 인준 결의 사항들이 많았다. 그런데 당장 현장에서 살펴보려니 어느덧 재촉의 소리가 들린다. 어떻게 할까요. 금새 동의(同意) 재청(再請) 소리가 나오더니 뚝닥 통과된다. 참으로 궁금하다, 동의 재청하던 실행위원들이 진정 살펴보고 인준에 허락한 것인지...아니면 임원회에서 올라온 것이니 살펴보지도 않고 그냥 믿고 순수히 따라야 하는 것인지 말이다. 또다시 다음 안건이 상정된다. 회의록 자료를 살펴보기도 전에 벌써 동의 재청에 통과되어 버렸다. 이건 정말 아니다 싶다. 물론 대상이 누구인지 처음에는 설명하더니 조금 지나자, 이젠 인준 대상도 거론없이 바로 통과되어 버린다. 최소한의 이름도 거론없이 말이다. 내 자신이 그 자리에 앉아 있다는 사실에 회의가 든다.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 어찌 그 많은 실행위원들이 있는데 좋은 게 좋은 거라 생각해서 그랬을까. 개인적으로 내 마음이 답답하기도 했고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정말 이건 아닌 것이다. 실행위원회를 마치고 로비에서 총회 서기 목사님과 대화하면서 “이런 실행위원회의 모습이라면 앞으로 참석할 의미가 없는 것 같아 지방회 부회장을 보내야 할까보다”라며 넋두리 아닌 넋두리를 했다.
집에 돌아온 후 지방회 보고자료를 만들기 위해서 차분하게 회의록 자료를 살펴 보았다. 살펴보던 중 성결대 이사 파송에 기존 교육이사의 유임이 아니라 신임 이사인준을 하였는데, 교육이사가 아닌 일반이사를 인준한 점을 발견하였다. 성결대 이사 15명중에 5명 이상은 교육이사가 인준되어 일을 해야 함이 교육법이라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2차 실행위원회 현장에서 미리 파악하였더라면 질의했을텐데, 저도 그렇고 그 누구도 이의달지 않고 인준했다. 뒤늦게나마 아차 싶었다. 교육이사 자리에는 교육이사를 인준함이 옳았다. 회의가 종료되었지만, 교육이사의 파송이 아닌 일반이사의 파송 인준에 대해 어떻게 해야 옳은지 지면을 통해서라도 총회장께 묻고 싶다. 
오늘이라는 귀한 하루를 투자해서 실행위원회에 사명감을 갖고 찾아왔는데 졸속 처리되는 결의는 최소한 막아야 될 것 같았다. 내가 행한 인준 결의가 우리 교단을 건강하게 든든하게 세워가는 틀을 만드는 것인데......

헌장 제96조 2항 임원회의 임무는 다음과 같다.
1. 임원회는 총회장이 필요한 때에 소집한다.
2. 총회 결의사항의 집행과 그 밖의 특별안건을 결의하고 집행한다.
3. 실행위원회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
4. 총회 산하기관의 인사에 관한 건은 제94조 22항에 따른다.
헌장 제94조 22항에 보면, “총회는 산하 모든 기관의 이사와 감사의 파송 및 집행부서와 특별집행부서의 위원의 선임은 정기총회의 위임을 받아 임원회에서 인선하여 실행위원회의 인준을 받게 한다.” 그렇다. 헌장의 의거, 안건 인준사항들을 임원회에서 충분히 확인 검토하고 합의 인선하여 실행위원회의 인준을 받게 해야 한다.
총회 임원회에 거듭 당부드리며 요청을 드린다. 임원회는 최소한 실행위원회 소집 두 주 전에 했으면 좋겠다. 실행위원회와 임원회가 같은 날 회의가 진행되어지는 것은 꼭 철회되어지기를 부탁 드린다. 지방회 안건들도 미리 지방회 임원들과 먼저 의논 결의하고 지방회에 올려 결의 시행하는데, 하물며 총회는 더욱 더 그리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에 총회 임원회는 최소한 두 주전에 회의를 갖고, 안건을 충분히 검토하고 논의 끝에 결의하여 실행위원회로 안건을 상정해 주시면 감사하겠다. 

끝으로, 실행위원들이 공정과 인애를 따라 소신껏 의견들을 피력했으면 좋겠다. 
‘침묵은 금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불필요한 말을 하지 말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이번 2차 실행위원회를 보면서 더욱 의분(義憤, 옳지 않은 일을 보고 일어나는 정의로운 분노)이 필요함을 느꼈다. 의로운 일에 잠잠하지 말고 말하는 실행위원회가 되어야겠음을 더욱 절감(切感, 아주 깊이 느낌)하게 되었다. 거듭 이야기하지만 안건 결의에 분명한 지방회장으로서의 바른 의견을 도출하고 토론하여 적재적소(適材適所)에 선한 인재를 등용하고 사역을 추진하는데 기꺼이 일조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이사야 56:10-12에 보면, “짖지 못하는 개”에 대해 비유로 말씀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파수꾼을 향해 맹인이요 다 무지하며 짖지 못하는 벙어리 개들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 총회 임원회나 실행위원회는 명예욕에 사로잡혀 서로 밥그릇싸움이나 하는 소인배 지도자들은 되지 않아야 한다. 회의 참석해 발언 한번 제대로 못하는 실행위원이 있다면 각성해야 한다. 좋은게 좋은 것이 아니다. 헌장이 아니라고 하면 세례요한처럼 바른 말 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앞에서는 말 한마디 못하고 뒤에 가서 말하는 비겁자는 되지 말아야 한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가 아니라 주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가 되었으면 한다.

이제 마치려 한다. ‘그전에는 그랬었는데...’라는 말은 이제 없어졌으면 좋겠다. 헌장에 위배된 과거, 통상, 관례라는 말은 사라져야 한다. 변혁의 새 시대를 꿈꾸는 100회기에서는 금기어로 여겼으면 좋겠다. 또한 ‘그 나물에 그 밥’이란 평가도 없었으면 좋겠다. 이전처럼 계속할 수는 없다. 이제는 변화하고 달라지고 혁신해야 한다.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공명정대한 실행위원이 되고 싶다.”고 다짐하고 결단하며 결심한다.
결론적으로 좋아하는 성경구절을 하나 소개하고 싶다.  
잠언 21:21 “공의와 인자를 따라 구하는 자는 생명과 공의와 영광을 얻느니라.” 
공의와 인자가 넘치는 실행위원회를 꿈꿔 본다. 여호와께 성결.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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